국내 중소 태양광 부품업체 A사가 국내에 유통되는 여러 브랜드의 인버터를 사들인 것은 올초다. 나름대로 목돈을 들여 500만~3000만원짜리 인버터를 여럿 사들인 건 제품마다 어떤 부품이 들어가고, 그 특성이 어떤지 직접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인버터를 뜯어본 A사 대표는 뜻밖의 결과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품 겉면에는 HD현대에너지솔루션, 한화큐셀, 효성중공업 로고가 선명했지만 실제로는 모두 중국산이었기 때문이다.

A사 대표는 “인버터 업체마다 사용하는 핵심 부품도 다르고 설계 구조도 판이한데, 한국 대기업 제품은 사실상 중국 제품과 똑같았다”며 “중국산에 LED를 장착하고 퓨즈를 추가한 다음 국내 브랜드로 파는 셈”이라고 말했다.
퓨즈만 바꿔 한국산 둔갑…태양광 인버터 95% '메이드 인 차이나'이미지 크게보기


◇자체 생산 사실상 포기

29일 태양광업계에 따르면 HD현대에너지솔루션, 한화큐셀, 효성중공업은 중국 제품에 자사 브랜드를 다는 ‘택(tag)갈이’ 방식으로 인버터를 판매하고 있지만 소비자에게는 이런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있다. 홈페이지에도 중국산이란 말은 없다. 빌딩, 공장, 주유소, 상가, 소형 발전소 등 인버터 소비자들이 사실상 중국산 제품을 샀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다는 얘기다. 빅3 중 한 곳 관계자는 “국내에서 자사 브랜드로 팔 수 있는 KC인증을 받은 만큼 법적 문제는 없다”며 “가격을 생각하면 중국산을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중국 기업들이 택갈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한국 시장 공략에 나섰다고 해석한다. 중국 제품에 대한 불신이 판매 확대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해 한국 기업들과 손잡고 신종 공략법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빅3가 처음부터 중국과 손잡으려고 한 건 아니다. 빅3 모두 인버터를 자체 개발했고, HD현대와 효성은 공장까지 세웠다. 하지만 ‘규모의 경제’를 갖춘 중국 기업들이 10~20% 저렴한 가격에 제품을 쏟아내자 맞상대하는 대신 한국에서 쌓은 브랜드 파워와 유통망을 중국 제품에 입혀 수수료를 받는 방식으로 사업 모델을 바꿨다.


빅3가 떠나자 남은 건 OCI파워, 금비전자, 이노일렉트릭, 동양이엔피 등 중소 업체뿐이다. 하지만 ‘중국+한국 대기업’ 연합군에 점유율은 매년 쪼그라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제품이 통째로 들어오다 보니 인버터 제조에 필요한 소재, 부품, 장비를 만드는 회사도 하나둘 문을 닫고 있다.

◇정보유출 안보문제 불거질 우려도

업계에선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국내 인버터 시장은 중국판이 될 것으로 걱정한다. 정부 계획대로라면 태양광 발전량은 현재 32기가와트(GW)에서 2036년 72.9GW로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난다. 신규 및 교체 수요를 고려할 때 향후 10년간 50GW 안팎의 태양광 발전기가 설치된다는 얘기다. 여기에 들어가는 인버터를 금액으로 따지면 7조5000억~10조원에 달한다.

에너지 안보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태양광 인버터의 핵심 기능 중 하나인 전력 상태 모니터링과 전력계통 제어 정보 등이 클라우드 서버에 저장되는 만큼 자칫 국가전력망 정보 등이 중국에 유출될 수 있어서다. 최근 중국 인버터 제품을 전수조사한 사이버 보안기업 포어스카우트는 “해킹을 통해 원격으로 인버터를 제어하거나 사용자 및 전력 정보 등이 유출될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이런 우려가 커지자 리투아니아는 중국산 인버터 원격제어를 막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업계에선 ‘인버터 공동화’를 막기 위해 국내에서 생산한 제품에 인센티브를 주는 동시에 국내산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인증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인버터 생산업체 대표는 “이대로라면 정부의 태양광 육성정책은 중국 기업만 살찌우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며 “국내 인버터 시장을 보호·육성할 인센티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상훈 기자 uphoon@hankyung.com